김명섭 한림성심대학 관광영어학과 교수

▲ 그 옛날 다방 레지(종업원)가 타주었다는 고소한 참기름을 살짝 얹어 계란 노른자를 띄운 기발한 한국식 모닝커피!

◇커피의 전파(3)

9) 한국
우리나라의 커피사는 아주 슬픈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문호개방이 늦었던 우리나라는 커피 문화의 유입도 비교적 늦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커피에 대한 이해와 열정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앞서가고 있으며, 최근 커피전문가인 바리스타(Barista)에 대한 열기 또한 어느 분야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바리스타 양성교육의 선봉에는 한국커피교육협의회(KCES)가 있으며, 그 산하 인증기관인 대학 학과, 대학부설 평생교육원, 사설아카데미 등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매년 바리스타 2급 자격증 취득자는 증가일로에 있으며, 향 후 수년간은 바리스타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가 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커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후기 정치가이며,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 선생의 서양 기행문인 ‘서유견문(1895년 출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책에서는 ‘우리가 마치 숭늉을 마시듯 서양인들은 커피를 마신다’고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역사상 조선 26대 왕인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긴 최초의 한국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먼저 커피를 즐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고종황제와 황태자가 1896년 2월 겨울 아관파천으로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게 되면서 공사 베베르( Karl Ivanovich Waeber)를 통해 커피를 접하게 되었고, 그 후 커피 매니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든 사람은 손탁이라는 여자로, 그녀는 베베르의 미인계로 당시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여인이다. 물론 친절함과 상냥함으로 고종의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1898년 러시아 통역관이었던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훗날, 순종)가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어 고종과 황태자를 해하려 한다. 그러나 커피를 마시기 전에 향을 즐겼던 고종은 이상함을 알고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여 치아가 망실되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온 후에도 커피 맛을 잊지 못하여 1900년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외국 사신들을 접대했으며 대신들과도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커피에 대한 명확한 이름이 없었던 당시에는 서양에서 온 탕국이라 하여 ‘양탕국’이라 불리었다.

1902년 Sontag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러시아 공사관 앞, 정동에 위치한 건물에 Sontag Hotel을 짓고 1층에는 ‘정동구락부’라는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오픈한다. 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커피가 소개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호텔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속에 일본의 힘이 커지면서 한일합방이 되고, 그 후 급속히 쇠퇴하면서 1918년 문을 닫고 만다.

한국인이 최초로 개업한 커피하우스는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이었던 이경손이 종로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라고 한다. 당시엔 커피하우스를 ‘다방’이라 불렀으며, 서울의 명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후엔 그 이름이 ‘다실’로 변하였고, 점차 ‘찻집’으로까지 변하여 갔다.

1928년에는 복혜숙이 종로 2가에 개업한 ‘비너스’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당시 윤보선 대통령도 단골이었다 한다. 1932년에는 조각가 이순석 선생이 조선호텔 건너편에 ‘낙랑팔러’라는 커피하우스를 오픈한다. 이곳에는 유럽의 커피하우스와 마찬가지로 문학인, 연극인, 화가, 영화인 등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어 화제가 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서울 곳곳에 다방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물론 더 이른 시기에 커피하우스가 소개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커피하우스는 모두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곳뿐이었다.

1950년대 초 6.25 전쟁 중에 미군 PX를 통해 잊지 못 할 커피가 등장하게 된다. 물론 PX를 통해 흘러나온 그 커피는 시리얼 등과 함께 암거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 하는 커피가 아닌가 싶다. 바로 인스턴트 커피다. 정확한 영어 표현으로는 ‘물에 녹는다’는 의미의 Soluble Coffee이다. 1901년 일본인 Satori Kato씨에 의해 처음 개발 되었다고 하는 인스턴트 커피는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 동서식품에 의해 최초로 생산되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서 인스턴트 커피의 인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

1960년대의 다방문화는 마담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담이 매출의 상당부분을 좌우하게 된다. 또한 전화가 많지 않았던 터라 사장님들이나 동네 건달들의 전화 통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유럽에서처럼 우리나라의 다방도 문학 예술인들의 공간이기도 했다. 생활이 풍족하지 못했던 예술인들에게 일종의 공간적인 만족감과 여유로움, 그리고 작품에 대한 토론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지적인 공간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 커피하우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이 동숭동에 오픈하게 된다. 원두커피 판매의 새바람을 불러온 커피전문점의 이름은 다방의 ‘다랑’에 ‘난’자를 붙인 ‘난다랑’이다. 난다랑은 현재의 커피전문점을 능가하는 시설과 서비스로 시선을 끌었다. 큰 통유리에 밝고 확 트인 매장과 고급스런 소품으로 장식된 공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한 커피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제공하여 원두커피 홍보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978년에는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하여 우리나라 커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원두커피를 즐기는 커피 매니아가 늘어나지 않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스턴트커피의 발전에는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Wino's Coffee Story 참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추어 1987년 커피 수입 자율화가 이루어진다. 커피양이 부족하여 커피에 다른 이물질을 넣어 커피양을 늘리려 했거나, 커피를 밀수입해야 했던 많은 부작용들이 없어지게 된 셈이다. 그 후 에스프레소 머신이 소개되어 진하고 생소한 에스프레소를 마시게 되었고, 스타벅스 한국점이 오픈하게 되고, 테이크아웃 전문점들이 등장하여 커피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현재는 커피를 자체 로스팅하여 판매하는 소위 로스터리 카페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으며, 대기업이 개발한 대형 커피전문 브랜드들이 커피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자칫 매출만을 우선으로 하는 경쟁에만 열중하다 소중한 것을 놓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가 된다. 이제는 양적인 팽창보다는 질적인 면에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것이 커피시장 롱런의 길이 아니가 생각해 본다.

(글=김명섭 한림성심대학 관광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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